
2026 중간 평가
이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걸까?
July 6, 2026
안정형 인간
돌아보면 저는 늘 안정성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. 카이스트에 입학해 반도체시스템공학과를 선택한 것도, 미래에 취업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삼성 입사라는 보험을 하나 들어 둔 셈이었습니다. 재학 중 참여한 여러 창업 프로젝트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. 무엇이 성공할지 알 수 없으니, 능력이 닿는 대로 가짓수를 만들어 두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것 같습니다.
2026년의 정확히 절반쯤을 지난 지금, 그 노력들이 슬슬 현실로 넘어오려는 게 보입니다. 아직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지만, 뭔가 되긴 될 것 같은 느낌이 조금씩 듭니다.
여유로워진 학교, 넓어진 바깥
그 여유가 어디서 왔는지 짚어보면,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. 그때 전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. AP를 포함해 매 학기 학점을 끝까지 채워, 1학년에만 8-90학점에 가까운 수업을 들었습니다. 지금 고생하면 나중이 편할 거라는 생각, 그리고 대학에 갓 들어와 한번 더 열심히 해보자는 새내기의 불씨(?)가 꺼지기 전에 최대한 달려 보자는 생각으로 밀어붙였는데, 그 보람이 2학년부터 체감되기 시작했습니다. 더 적은 과목만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고, 시간표에 여유가 생기니 친구들과 노는 데도, 외주를 맡아 처리하는 데도, 제 프로젝트에 쏟는 데도 시간을 더 쓸 수 있었습니다.
향수 커뮤니티 개발, 세무테크 시스템 개발, 헤어샬롱 CRM 시스템 구축, 위키 개발, 온라인 음악 믹싱 협업 시스템 개선까지, 다섯 건이 넘는 일을 직접 물어 와 미팅하고 만나고 소통했습니다. 도메인은 전부 달랐지만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, 한 번도 안 해본 일들을 가장 많이 겪은 시기였습니다.
이 과정에서 창업가분들, 투자자분들을 포함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신 정말 다양한 분들을 직접 만났고, 그분들에게서 배우고 얻을 게 참 많다는 것도 느꼈습니다.
배트를 백 번 휘두른다는 것
그중에서도 향수 관련 투자 유치 자리에 따라갔을 때 만난 대표님의 이야기가 오래 남았습니다. 제가 “정확히 이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요”라고 묻자, 대표님은 명확한 목적이나 비전은 설명할 수 없다며 대신 이런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.
대표님 말씀은 대략 이랬습니다.
스타트업 시장에서 1000개 중 성공하는 건 하나가 될까 말까다. 창업가들은 대개 자신의 배트질 한 번이 그 하나에 들어맞을 거라고 생각한다. 하지만 이를 멀찍이 떨어져서 본다면 그 확률은 낮음이 분명하니, 차라리 확신 하나에 배트를 한 번 휘두르는 대신 100번을 휘두르는 게 낫지 않겠는가.
꽤 오랜 대화 끝에 차차 이해하게 된 비전과 방법론이라 여기서 완벽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,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방식의 목표였습니다. 저는 대체로 명확한 비전이나 기업의 가치를 물으면 한 문장짜리 슬로건 같은 명쾌한 답을 기대했습니다. 그런데 이렇게 불명확한 목적도 자기 가설이랑 방법론만 있으면 완벽하게 이해가 됐고,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비전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.
저도 사실 비슷했습니다. 뭐가 될지 몰라서 손 닿는 대로 여러 개에 발을 걸쳐놓고, 그중 몇 개는 잘 되겠거니 하고 있었거든요. 근데 이걸 이렇게 총괄해서 실행하고 계획하고 운영까지 해내는 능력을 가지신 건, 진짜 다른 레벨이다 싶었습니다.
방에만 있던 사람이
이렇게 사람들을 만날 일이 계속 생기다 보니 저 자신도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. 원래는 큰일이 아니면 방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던 사람이었는데,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나고 밴드 선배님들과 유원지에도 다녀오는 등 여태껏 안 해보던 외부 활동에 몸을 던져 볼 용기가 생겼습니다. 그리고 저도 그런 거 은근히 싫어하지 않더라고요.
아직 결과는 없지만
이 중 아직 뚜렷한 결과로 이어진 건 없습니다. 하지만 이전부터 쏟아온 노력들이 법인화, 지분화되면서 점점 현실적인 부분으로 넘어오는 게 느껴지는 2026년이 된 것 같습니다. 그리고 어쩌면, 사람 만나는 게 싫지 않은 사람이 된 것 자체도 이번 상반기의 결실 중 하나일지 모르겠습니다. 과연 전 몇개의 안타를 쳐낼지 보자구요.